최 용 준 아이젠트리 안경체인 본사 교육원장

최용준

요즈음 주위 대부분의 안경원이 매출 감소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필자가 안경과 인연을 맺은지 어느덧 28년째에 접어든다. 특수교육학과를 지원했으나 여의치 않아 안경광학과에 지원하게 됐다. 이 당시만해도 안경광학과는 자동차학과와 함께 인기 학과 중의 하나로 기억하며, 당시 안경원의 수익은 꽤 좋았다.

필자가 안경원에 입사하고 제일 어려웠던 점은 고객과의 흥정이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바라보는 안경원은 거품 많은 안경테를 선택하면, 적당히 검안테에 검안 렌즈 몇 개 씌워보고 어느 것이 잘 보이냐는 형식적인 검안과 안경 렌즈(당시는 유리가 대부분)를 갈아주는 단순한 유리 세공 작업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즉 단순히 잘 보이면 되는 굴절 검사로 과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안경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고객들의 응대는 단순히 적응하면 된다는 식의 막무가내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눈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고객들은 안과를 방문해 처방을 받았으며, 처방으로 인한 불편함 또한 일부를 안경원에서 안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고객과의 흥정으로 인한 응대의 불편이 필자에게는 제일 컸었고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 종업원으로서 경영적 마인드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내가 바라는 안경원을 위해 이른 시기에 안경원을 오픈하게 됐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름 검안과 조제의 차별화 및 정찰제 등 열심히 시도 했으나 워낙 부족한 자금으로 시작했으며 주위 안경원과의 가격 경쟁 등으로 인한 어려움의 연속은 심한 스트레스였었다.

필자가 운영을 시작한 비전 사이언스 및 시기능훈련센터 전경이다. 센터는 대구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 오픈을 했는데 이 때부터 안경원의 가격 파괴가 시작됐다. 이 가격 파괴가 거의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으며, 현재의 가격 파괴는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다.

오픈 이후의 지속적 경영 악화 및 꿈과의 다른 현실의 벽으로 인해 안경원을 접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시기에 전문적인 양안시라는 것을 김재도 박사로부터 접하게 됐다. 이 당시 내게는 '암흑 속에서 헤메이는 저를 인도한 한 줌의 빛과 같은 희망'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김재도 박사의 도움으로 양안시를 접하게 됐으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V.T라는 것을 접하게 됐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정말 열정적이었다. 아마 내 생에서 가장 열정을 불태운 시기가 아니였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V.T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00년 중·후반대였다. 이 때를 돌이켜 보면 너무도 서툴렀고 그런 무모한 용기가 어디서 생겼는지 싶다.

최초 V.T의 사례는 항상성 외사시로 사시각은 원거리 30, 근거리 25프리즘 정도 및 원거리 얕은 억제 증상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김 군을 위해 나름 훈련 과정을 계획하고 장비 및 프로그램 또한 직접 서툴지만 만들기까지 했었다.

이 친구의 가장 합리적인 훈련은 억제가 되지 않는 즉 복시를 호소하는 60cm 이내에서 조절을 이용한 버전스훈련을 통해 질 높은 융상(감각적 융상)을 자극하며 차츰 원거리 융상의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최초 근거리(40CM)에서 20 B.I 프리즘을 가입하니 복시가 해소됐다.

1. 근거리 40cm에서 근거리 0.63 정도 크기의 조절용이 측정용 카드를 이용해 숫자를 읽도록 지시하고, 프리즘바를 사용해 20 / 18 / 16 복시 ▲1-2. 프리즘바 20 / 18 / 16 / 14 / 12 복시 ▲1-3. 프리즘바 16 / 14 / 12 / 10 / 8 / 6 / 5 / 4 복시 ▲1-4. 프리즘바 8 / 6 / 5 / 4 / 3 / 2 / 1 / 0 복시 ▲1-5. 프리즘바 2 / 1 / 0 복시 (프리즘바를 빼면 복시를 호소함 1프리즘이란 적은 량인데 프리즘만 빼면 복시 호소 아마 심리적 요인인 것 같음) ▲1-6. 프리즘바 12 / 8 / 4 / 2 / 1 / 0(나안) ▲1-7. 낱개 프리즘 6 / 0 ▲1-8. 낱개 프리즘 6B,I / 0 / 2B.O 훈련 및 조절용이 훈련

2. 거리 60cm 이동 0.63 정도 크기의 조절용이 측정용 카드 이용 나안 / 4B.O(버전스용이) → 훈련자가 확실한 피드백을 제공 받음 여기서 부터는 쉬움

3. 거리 100cm → 150cm → 200cm → 300cm → 400cm로 점차 이동

4. 원거리 융상 가능 원거리 타깃을 보며 제자리 걷기 / 오른팔 들어 왼팔 들어 등 응용훈련

5. 원거리 버전스 강화 훈련 즉 1B.O / 2 / 4 차츰 늘려감 (억제 자연 제거 및 훈련자에게 피드백이 제공돼서 쉽게 진행됨)

6. 신체 활동 응용 및 입체시를 응용한 버전스 강화 훈련 및 훈련자에게 복시일 때 단일시 유도 지시(훈련자 본인이 눈이 돌아 갔다는 것을 인지함)

10년 전에 내가 시킨 훈련은 이러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내가 4m가량의 원거리에서 김 군에게 "택수야, 이젠 눈을 모을 수 있어. 내 주먹이 두 개로 보이지? 하나로 합쳐봐!"라고 했을때 김 군의 눈이 정말 희뜩 희~뜩 정위로 돌아 올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까지 생생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는데 김 군은 내 딸과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이었다. 김 군의 훈련 때 응용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내 딸의 목소리를 첨가했다. 지금도 김군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한번씩 내 딸의 목소리를 들으면 김 군이 생각 나곤 한다. 내 딸이 벌써 대학생이다. 김 군 역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훈련의 스킬적인 면에서 예전보다 물론 많이 발전했겠지만 그 때의 열정은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다. 필자는 훈련을 시킬 때 마다 항상 '스킬 보다는 열정이 더욱 강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필자의 임상 사례 중 가장 오랜 시간 훈련을 시킨 사례는 황X봄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으로 정신적 지체장애가 있으며, 신체 활동도 자유롭지 않고 눈의 움직임도 문제가 있으며, 약시, 안진, 경도의 내편위 및 수직 편위도 있었다.

당시의 내 능력을 너무도 잘 알기에 훈련을 극구 만류했으나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훈련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체장애로 인해 눈움직이 원활 하지 못하니 '눈움직임 훈련만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무보수로 임상 경험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겠지만 외동 딸을 둔 김양의 부모님 열성은 남 달랐다. 이런 부모의 사랑에 떠밀려 이 친구에게는 정말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응용 훈련을 시켰다.

포맥스라는 플라스틱 판에 구멍을 뚫어 실꿰기, 빨대 꼽기 등을 비롯해 얇은 것을 찾다가 우연히 한의원의 침이 생각 나서 의료상에서 구입한 바늘 끝을 혹시나 다칠까 싶어 무디게 해서 꼽기 훈련, 밸런스보드도 직접 만들어까지 수행했으며, 피아노를 칠 때 악보 보기가 힘이 든다고 해서 일명 악보의 음표 '콩나무 대가리'를 응용한 추종, 충동 훈련,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 EYE MOVEMENT와 응용한 걷기 훈련 등 정말 응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단지 '이렇게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실천에 옮길 정도의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주 2~3회 방문, 3개월 정도의 훈련을 하고 어머님과 상담 중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 세상에 버스 번호도 아주 가까이 와야지만(즉 버스의 속도가 거의 멈추다시피 했을 때) 버스 번호를 인식하던 딸인데 며칠 전 제가 김 양의 고모를 자동차에 태우고 지나가던 것을 김 양이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는 제 딸을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워낙 빠른 속도로 차가 지나갔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하며 너무 좋아했다. 나로서는 감사하고 보람있는 결과였다.

김 양을 거의 2년 정도 훈련시켰는데 고집 센 김 양의 성격으로 인해 참 속도 많이 썩고 고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김 양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김 양으로 인해 내가 참 많은 임상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필자가 느낀 시기능훈련이란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고 열정만 있으면 시간의 차이일 뿐 결과는 뛰어난 전문가나 조금 부족한 전문가도 같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인연으로 그만 두려고한 안경과의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필자의 소견은 앞으로 안경사가 개척해야 할 길 중에 가장 아름답게 꾸밀 수 있고 직업의 보람 또한 느낄 수 있는 길이 시기능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필자는 이런 소중한 인연을 바탕으로 대구 범어동에 50평 규모의 시기능훈련센터 및 법인을 올해 8월에 설립했다. 그동안의 임상을 바탕으로 안경사의 새로운 길에 도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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