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 eye논단]김수현 작가를 만나다

2010-06-01     이재령
김수현 작가를 만났다. 마침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를 집필 중인지라 걸맞은 질문 세 개를 준비했다.

당신에게 있어 드라마는 무엇입니까. 사랑은 무엇입니까. 또 인생은 무엇입니까.

선생의 답변은 이러했다. “인생은 아름답긴 이미 틀린 일이지만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0년 넘게 인생을 엮어왔고 40년 넘게 드라마를 써 온 분의 답변인지라 아프게 와 닿았다. 하지만 철학자 칸트 선생이 나타나 위로해 준다. es ist gut! 그는 80세 생을 마감하며 ‘좋다!’고 했다. 평생을 태어난 곳에서 30리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지만 바깥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알기 위해 그를 찾았다고 한다. 혹시 그녀의 인생관에도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을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사랑에 대한 물음엔 ‘있긴 있는 거요’ 라고 되물었다. ‘사랑이 뭐길래’를 썼던 적이 있지 않냐고 응수했다. 사랑은 ‘취향’이라고 했다. 취향! 생각해보니 멋진 깨달음 같다. 사람마다 취향은 백인백색, 짚신도 짝이 있는 법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드라마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주저함 없이 “생업”이라고 했다.

40년 넘게 우리의 안방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하고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던 그녀, 먹고 살기 위해 그 일을 해왔다고 한다. 풍문으로는 모든 신간 소설과 개봉 영화들을 그 누구보다 먼저 읽고 먼저 본다는 양반이다. 온갖 다큐멘터리부터 갓 데뷔한 병아리 작가의 작품까지 밤새워 본다는 그녀다. 몇 시간의 강의를 기대했던 터에 달랑 두 글자로 ‘생업’이라니 고승(高僧)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듯도 하고 공력(工力)이 약해 우문(愚問)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 얼마 후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배가 두 조각 나면서 46명의 군사가 창졸간에 실종된 비극이었다. 첨단 장비와 무수한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원인규명은 둘째 치고 배 한쪽을 못 찾고 있었다. 며칠 후 다행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생업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가 바다 밑에 가라앉은 함미를 찾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생업! 일찍이 생업이란 말에서 그런 숭고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 어부야말로 김수현 작가가 말했던 생업정신으로 중무장한 전사일 것이다. 그렇게 빛나는 정신을 목격하는 일은 연속해 벌어졌다. 산악인 오은선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던 날 방송사의 한 카메라맨이 정상에 함께 올라 그 감동의 순간을 우리들의 안방에 생방송으로 전했다. 방송 사상 세계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는 목숨을 건 취재 등반을 마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회사가 가라면 간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취업정신으로 투철하다. 20대 젊은이들의 취업난이 눈물겹고 애처롭다. 떠도는 말로는 취업을 위해 몇 천만 원짜리 해외연수를 다녀오고 대학원·어학원·고시학원 등 별별 스펙을 쌓는다고 한다. 그런 어려움을 겪고 취업에 성공한 후 3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그들의 취업정신은 생업정신으로 전환돼 자라나고 있을까. 생업정신은 취업정신과는 다르다. 생업정신은 자신의 진정한 자존심이 만들어 내는 자신을 향한 횃불 같은 것 아닐까 싶다.

고기떼를 찾아 바다 구석구석을 안방처럼 훤히 꿰뚫으려는 그 어부의 빛나는 눈처럼, 한국인의 기개를 전하기 위해 안나푸르나의 신에게 운명을 맡긴 그 사내의 어깨처럼, 밤새워 쓰는 글 밤새워 읽는다는 명언을 새기며 한 줄 한 줄 대사를 빚어내는 언어의 마술사처럼.

이 기회에 내 꺼져가는 생업정신의 횃불도 먼지를 털어내고 기름을 부어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