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 왔다. 매번 여행지의 새로운 세상 속에서 보고 느끼며 배우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삶의 가장 행복한 부분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여행은 파리라는 도시의 특성 상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화려한 색상들이 조합돼 여행하는 내내 황홀한 기분이 떠나질 않았다. 또한 연 핑크, 핫 핑크, 코럴 핑크 등 핑크 계열 색채의 미묘한 차이와 종류를 인지하고 의상을 코디한 남성 파리지앵들이 눈에 띌 때면 보이는 것(seeing)에 대한 즐거움을 가장 잘 만끽하는 문화를 가진 것 같았다.
이러한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는 여러 미술관을 관람하는 내내 더욱 많은 감탄을 자아냈다. 미적 예술에 조애가 깊은 나라인 만큼 수많은 갤러리에는 세계적 명화들이 많이 전시돼 있었는데 인쇄된 지면이 아닌 실물로 작품을 접한 느낌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주었다. 늘 궁금했던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농부 부부의 바구니에는 정말 감자가 들어있었던 건지 코가 닿을 듯 가까이도 다가가 보고, 빛의 변화가 주는 신비로움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모네와 르누아르의 작품들 앞에선 기하광학 수업 때 배웠던 빛의 변화와 원리를 상기해 보며 이론이 다 설명하지 못하는 빛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화가들은 같은 세상을 바로 보고 있지만 일반인과는 다른 레벨의 '눈'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그들의 시력이 궁금해졌다. 평생 1.2로 우수한 시력을 유지해 온 내가 보지 못하는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화가들은 어떤 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굴절이상이 화가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예로는 모딜리아니가 있다. 고도 근시였던 그의 작품 속 초상화는 모두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엿가락처럼 늘려진 얼굴로 표현돼 있다. 작가의 그림 속 얼굴들이 늘어난 일괄적인 방향과 정도를 토대로 난시 축과 원주 량을 유추해 보는 것은 검안을 배운 사람들만의 모딜리아니 작품을 관람하는 쏠쏠한 또다른 재미이기도 하다.
근시로 유명한 화가로는 풍경화의 대가 세잔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을 남긴 로댕 등이 있는데 이 둘은 아이러니하게 근시라는 굴절이상이 작품성을 인정받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당뇨성 근시가 심했던 세잔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흐릿하고 다소 거칠게 표현된 원거리의 풍경이 수많은 풍경화 중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데 큰 장점이 됐다. 또한 로댕의 경우 여느 미술 학도와 같이 드로잉으로 시작을 했으나 결국 시력으로 인해 섬세히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보다 크고 거칠게 표현되는 청동 조각물에서 부각을 나타내게 된다. 근시를 교정하지 않고 살아간 두 대가의 일상 생활은 불편했겠지만 두 작가 그리고 그 작품을 즐기는 후손들에게 하늘이 준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수련'이 피어 있는 연못 장면을 생애에 걸쳐 연속적으로 그려낸 모네를 통해 우리는 백내장이 우리 시생활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모네의 후기 작품들처럼 백내장으로 인해 매일 바라보는 일상의 장면이 몇 십년 후에는 또렷하지 않고, 색상이나 경계선이 흐릿해 진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면 현대의 디지털 카메라도 담아낼 수 없는 백내장을 가진 인간의 시선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 모네가 감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참 다행스러운 것은 모네의 작품 중 초기의 선명한 수련 못 보다 후기의 추상화적 수련 못이 더욱 유명하고 예술적 가치가 크다는 점에서 앞으로 언젠가 우리도 보게 될 백내장과 함께할 시생활이 너무 두렵지 만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더욱 예술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리 여행 내내 'Farnsworth D-100' 색각 테스트에서 보던 수많은 색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배운 것 같다. 실제 테스트를 진행하면서도 '이 많은 색채를 실제 생활에서 보기는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정말 보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만끽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같은 생각이 들었을까? 여행의 말미쯤 동행한 딸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저는 잘 볼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해요." 잘 본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주는 존재인가? 그리고 이런 큰 행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주는 우리 안경사들 역시 얼마나 큰 은총을 받은 존재인가? 장영은 칼럼 '행복한 안경사, 행복한 고객'